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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와 자유의지 사이의 모순, 인과론과 목적론 본문

예지와 자유의지 사이의 모순, 인과론과 목적론

primolevi 2017. 4. 26. 21:23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中

 『당신 인생의 이야기』, 208-219면.

 

미래를 아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단지 추측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실제로 아는 것이 가능할까?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은 시간 대칭적이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물리적인 차이는 없다는 이야기를 게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맞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가면 대다수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근거로 내세워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보르헤스풍의 우화적 이야기를 통해 반론을 전개해보겠다. 과거와 미래에 걸친 모든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세월의 책』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다고 치자. 원본을 작게 복사한 것이지만, 이 책은 여전히 거대하다. 한 손에 확대경을 든 이 여자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티슈처럼 얄따란 책장을 넘긴다. 자신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을 기록한 대목을 찾아낸 그녀는 다음 대목으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그날 그녀가 나중에 하게 될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녀가 책에서 읽은 정보를 바탕으로 경주마인 '될 대로 되라'에 100달러를 걸고 스무 배에 달하는 배당금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정말 그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청개구리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탓에 그녀는 경마에 돈을 걸지 않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세월의 책』은 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시나리오는 어떤 사람이 가능한 미래가 아닌 실제의 미래에 관한 지식을 제공받는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비극이었다면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 사정에 의해 결국 그 운명에 따라 행동한다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갈 것이다. 어차피 그리스 신화의 예언은 모호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에 비해 『세월의 책』은 극히 명확하고, 책에 명시된 식으로 그녀가 경주마에 돈을 걸도록 강요한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겨난다. 『세월의 책』은 절대 옳아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이 뭐라든지 그녀는 그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 사실을 양립시킬 수 있을까?

양립할 수 없다, 가 통상적인 대답이다. 『세월의 책』은 논리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 자체가 위에서 언급한 모순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조금 관대한 입장을 취해, 독자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한 『세월의 책』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특별 컬렉션의 일부이고, 이것을 열람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중략)

 

The rabbit is ready to eat. 이 문장에 관해 생각해보자. 여기서 rabbit을 eat의 목적어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저녁식사가 곧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문장이 된다. 그러나 rabbit을 eat의 주어로 본다면 이것은 이를테면, 어린 소녀가 퓨리나사의 애완용 토끼사료 봉지를 열 작정임을 자기 어머니에게 알리는 경우에 맞는 암시에 해당한다. 이 둘은 완전히 상이한 언술이다. 사실 한 가정 안에서 이 두 언술이 공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타당한 해석이다. 문맥이 이 문장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할 뿐이다.

빛이 한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와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맨 처음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 양측은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 비해, 헵타포드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중략)

 

헵타포드들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의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차적 의식이라는 맥락에서는 완벽한 현실이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지만, 강제 또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맥락이 서로 다를 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타당하다거나 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유명한 착시 현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고개를 뒤쪽으로 돌린 우아한 젊은 여인으로도 보이고, 턱이 가슴에 묻힐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울퉁불퉁한 코를 한 노파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그림의 경우처럼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쪽 모두 동등하게 타당하다. 그러나 두 그림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행위를 포함해서,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중략)

 

만약 아직 진상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가 이 광경을 묘사했다면, 이런 질문이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헵타포드들이 자신이 말하거나 들은 얘기를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다면, 그들이 언어를 사용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타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언어란 단지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행위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언어행위이론에 의하면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나는 이 배를 이렇게 명명하노라" 혹은 "약속하겠어" 따위의 서술문들은 모두 수행문이다. 발화자가 이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행위의 경우, 앞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결혼식 하객들은 누구나 "이제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실제로 목사가 그 말을 할 때까지 결혼의 의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수행문적 언어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 등가인 것이다.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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