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폴 오스터, 「유리의 도시」 본문

폴 오스터, 「유리의 도시」

primolevi 2021. 2. 1. 20:59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땐 폴 오스터가 유행이었던 것 같다.『달의 궁전』, 『뉴욕 3부작』,  『우연의 음악』,『신탁의 밤』  같은 작품을 줄줄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제목이 다들 멋졌다.

     뉴욕 여행 이후 문득 『뉴욕 3부작』을 다시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뉴욕 3부작』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3부작 중 첫 번째인 「유리의 도시」를 읽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별로 읽고 싶지 않아졌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대니얼 퀸)인데, 그는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맥스 워크'라는 탐정에 관한 추리소설을 써서 근근이 먹고 산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폴 오스터'라는 탐정을 찾는 전화가 걸려 오고, 퀸은 잘못 거셨다며 전화를 끊는다. 끊고 나니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 발신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퀸은 폴 오스터 행세를 하고 이야기라도 들어줄 걸 하고 후회하는데, 다행히 같은 사람을 찾는 전화가 이후에 또 걸려 온다. '퀸'은 발신자의 오해를 재차 교정해주는 대신 자신이 탐정 '폴 오스터'가 되어 발신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로 마음 먹고, 그런 퀸의 이야기를 또 다른 작가인 익명의 서술자가 사후 보고의 형태로 우리 독자들에게 들려 준다. 

     설정을 요약하는 데서부터 복잡하다. 돌고 돈다. 탐정소설을 쓰는 작가가 자기 작품 속 인물처럼 탐정이 되고, 그 탐정의 이름은 소설 밖 실제 작가의 이름과 같다. 이렇게 작품의 안과 밖은 몇 겹의 도돌이표를 만나 서로 뒤섞인다. 그런데 결국 소설 속 핵심 사건은 해결 부근에도 가지 못한다. 바벨탑이나 돈 키호테를 끌어들여 실재와 이름 사이의 간격이나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관해서 은근히 물음을 제시하지만, 그것도 치밀하게 묻거나 하지 않고, 슬쩍 비치고 넘어갈 뿐이다.

     사건이나 철학적 통찰을 미완으로 남겨두는 것이 곧 소설의 약점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소설 내적으로 풀 생각이 없는 미스터리를 던진다. 그건 애초에 목적이 다른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럼 목적이 뭐냐? 내게 이 소설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모자 안의 비둘기처럼 꺼내는 것 자체, 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속 이야기와 바깥 이야기가 만나는 구도를 그려 보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런 것이 예전의 내게는 아마 그럴듯해 보였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지금은 즐겁지 않다. 이야기의 힘이니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좀 자의식 과잉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게 아니라, 소설 속 인물과 소설 밖 작가가 서로 껴안고 돌고만 있는 것 같지 않나?

     최근에 읽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도 겹겹의 이야기들 사이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는 점에서 약간 비슷했지만, 이처럼 밉지는 않았다. 온다 리쿠에게는 실제로 맡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유의 분위기가 있었고, 전개에도 힘이 있었다. 제대로 해결해 줄 것처럼 기대를 잔뜩 하게 해 놓고 끝에 가서 뭉개버려서 그렇지, 적어도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 자체를 방해하면서 수작을 부리지는 않았다. 반면 폴 오스터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허구 안에 섞인 실재와 실재의 힘을 얻은 허구 사이'라는 관념의 선전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계 허물기'가 가져오는 작품 바깥의 효과 같은 것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테면 '쓰인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읽기 과정에서 뒤통수를 맞은 독자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반성함으로써 얻어질 효과 내지 깨달음'과 같은 것을 작가가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왠지 괘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무언가 쓰지 않은 것을 통해서 승부를 보려는 것 같고, 오히려 이런 게 독자를 손바닥 안에 두려는 시도 같고, 교훈적인 것 같고, 정면돌파가 아니라, 뭔가 잔기술 같고, 또 기껏 읽었더니, 허무해지고, 허무해졌더니, '그게 바로 내가 노린 거야' 하는 것 같고. 빙빙 돌리고, 말을 하긴 했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 하지는 않고, '이 말을 둘러싼 전체의 맥락을 보고 나의 의도를 읽어라' 하는 것 같고. 게다가 영원회귀, 차이의 반복, 포스트모더니즘, 이런 이름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오늘날 너무 많다, 너무 우려먹는다, 하는 느낌도 있다. 그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의 전부일까 싶고, 반감이 있다. 

 

     나로서는『어둠의 왼손』 1976년 서문에서 어슐러 K. 르 귄이 밝힌 관점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진리!' 그렇다. 확실히, 소설가들은, 적어도 그들이 용감해지는 순간에만큼은 진리를 갈망한다. 진리를 알고 싶어하고, 말하고 싶어하고, 섬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독특하며 우회적인 방식을 택한다. 말하자면,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사람들과 장소, 사건을 꾸며내고, 이 허구들에 대해 자세하고 장황하게 감정을 한껏 실어 이야기하는 방법을 쓴다. 그리고 이 거짓말 보따리를 다 써내린 뒤에 말한다, 자! 이것이 진리다!
소설가들은 자신들의 거짓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사실을 이용하기도 한다. 진짜로 존재하는 장소인 마샬시 감옥, 실제로 싸움이 있었던 보로디노 전투, 실제로 실험실에서 행해지는 생체 복제 과정이나 교과서에 설명된 인격 붕괴 과정 등을 기술할 수도 있다. 이렇게 검증 가능한 장소/사건/현상/행위의 무게가 독자로 하여금 순전한 허구, 작가의 마음이라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가 아니면 결코 그 어디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역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다. 미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를 믿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들과 함께 보로디노 전투를 지켜본다. 심지어 나폴레옹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책을 덮은 뒤에야 (대부분의 경우) 제정신이 돌아온다.

     소설가의 작업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순전한 허구"라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것, 독자들을 이야기로 끌어당겨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이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소설가가 알고, 말하고, 섬기고 싶어하는 진리를 "독특하며 우회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이 편이 훨씬 마음에 든다. 이야기 안에 들어가려는 독자를 다시 이야기 바깥으로 불러 세우는 것 말고. 그래서 터키 아이스크림 아저씨처럼 이야기를 도구로 삼아 이야기를 읽는 독자를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 말고.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무언가라면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미술은 다른 길이 없었다고 해도, 소설에도 다른 길이 없었는가? 

     내겐「리타 헤이워스와 쇼생크 탈출」의 스티븐 킹 쪽이 훨씬 호쾌하고도 멋지다. 남들이라면 끝까지 감춰 둘 결말을 스티븐 킹은 도입부에서부터 공개하고 시작한다. 그를 보면 진실로도 거짓으로도 이끌 수 있는 모호한 암시를 전반부에 잔뜩 펼쳐 놓고, 결말을 꽁꽁 숨김으로써 얻어질 반전효과를 노리는 것까지도 한낱 하수의 '계산'이나 잔기술처럼 보인다. 이야기발, 말발로 독자를 끌고 갈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이다. 독자가 "작가의 마음이라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가 아니면 결코 그 어디에서도 일어난 적" 없는 사건과 실재한 적 없는 사람들의 존재와 이야기를 믿게 만들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눈앞에서 나타났다가 이유 없이 사라지는 아이스크림  같은 이야기 말고, 그 허탈감을 통해서 무언가 깨우침을 주려는 소설 말고, '아이스크림을 네게 주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만 독자를 독려할 수 있는 소설 말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탐정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그가 어느날 진짜 탐정 일을 맡게 되면서 소설 속의 소설이 소설 속 현실이 되고, 반대로 그 탐정의 이름이 소설 밖 작가의 이름이어서 소설 밖의 현실이 소설 속의 현실이 되면, 그래서 현실과 서사가, 서사와 현실이 섞여 있다면 이 현실과 서사의 의미는 무엇이겠니' 물으면서 간장공장 공장장 놀이와 같은 혼동을 목표로 하는 것 말고, 일단 맛은 보장할 테니까 먹어. 맛있게 먹으면서 생각해, 쪽이 낫다. 소설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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