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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H 병원 517호 (1)

primolevi 2017. 1. 29. 21:55

오늘은 2017년 1월 29일 일요일. 어제가 구정이었고 내가 이곳에 머무른지는 6일째가 되었다. 내일이면 퇴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 신세를 질 때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바로 밤마다 경쟁하듯 병실 가득 울려 퍼졌던 코골이 소리와, 그 때문에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곯아 떨어진 내가 필연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었던 잠에 대한 갈증과 욕구를 — 그들의 기상과 동시에 시작하여 잠들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 티비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좌절시키고야 말았던 룸메이트들의 존재였다.

 

그런데 병실에 들러 짐을 풀고 있는데, 제대로 된 인수위를 꾸릴 겨를도 없이 517호의 전임자는 517호의 모든 시설물 — 침대 둘과 옷장 둘, 소형 냉장고 둘과 서랍장 둘, 쓰레기통 둘과 시계, 달력, TV, 전화기, 병실 자체에 딸린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 의 사용권과 환기 및 난방 조절권, 거기에 리모컨을 독단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권한까지 전부 내팽개치고서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간단한 손짐을 넘기고 깁스를 한 팔을 팔목지지대에 걸어 가슴에 붙인 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떠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올림픽 계주 경기에서나 볼 법한 속도감과 치열함으로, 나의 입원 수속과 그의 퇴원 수속은 바통 터치를 해내었다.

 

어머니는 입원 기간 내내 병실을 혼자 쓸 수도 있겠다는 소녀 같은 전망을 낙관적으로 떠올리셨고, 나는 그 꿈이 품기엔 너무도 찬란한 것이라 여겨 감히 긍정할 엄두도 못 내고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명절은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일제히 현금과 짐보따리를 챙겨 현재의 거주지를 떠나 옛 집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러진 팔다리를 낫게 하고 허리디스크와 만성 요통의 질주에 잠시 제동을 걸며, 자칫 부러질 뻔한 팔다리를 돌보시는 영험함까지 지닌 것이 틀림없다. 구정은 스스로를 D-Day로 삼아 정형외과 병동의 입원 환자 수를 연간 최소치에 근접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입원 당시 Hxxx-Hospital의 와이파이 신호는 귀성길 고속도로 마냥 꽉 막혀 있었고, 그래서 이건 명목상의 것일 뿐이며 우리 모두를 농락하고 기만하기 위한 용도로 구축된 것이자, 누구도 단 한 번도 연결에 성공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전설의 와이파이인 것 아닌가 하는 의심에 강력히 사로잡혀 있었는데, 다음 날이 되자 거짓말 같이 와이파이 접속을 향한 길은 새벽의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500메가 밖에 남지 않았던 이번 달 데이터 한도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었던 나는 병동 와이파이의 가호를 갑옷처럼 두른 채 팟캐스트를 다운받고, 새로운 검색어를 15개 이상 발굴하며, 아스날과 사우스햄튼의 FA컵 32강전을 보는 한편으로, 데이터 장벽을 뛰어넘어 호그라이더마냥 클래시 오브 클랜의 전장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원에 안 오는 것이 무엇보다 좋겠지만, 이쯤 되면 앞으로 혹시라도 또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으면 설이나 추석을 골라 입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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