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이어폰과 떡만두국과 커피 본문

이야기

이어폰과 떡만두국과 커피

primolevi 2017. 9. 21. 15:30

제출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스트레스로 우울해 하던 중 ㅅㅊ이가 서울에 와서 하룻밤 묵어간다고 했다. 치킨시켜 놓고 기다렸는데 이놈이 미국여행에서 산 선물이라며 이어폰을 떡하니 내놓았다. 생김새가 특이한데 유닛에 투명한 고무패킹을 연결할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고무패킹이 귓바퀴 안쪽 홈을 따라 걸쳐지게 만들어놓았다. 보청기가 이런 모양일까, 어쨌거나 요물이다. 귀에도 꼭 맞고 썩 마음에 든다. 밤새 가장 작은 볼륨으로 키스 자렛 할배를 들려주었고, 이제는 엘리엇 스미스를 틀어놓았는데 소리가 왠지 감동적이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을 새웠는데도 드리기로 약속했었던 제2장을 결국 다 못 썼다. 화요일까지 드리겠다는 메일을 드리기 전까지는 불안했는데, 보내고 나니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결국 화요일이 지나 수요일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고 일어나면 속이 꽉 막혀 답답했고, 어쩔 땐 이러다 멈추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뛰었다. 자려 들면 잠이 오지 않았고 일어나면 잠이 왔다. 수요일엔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하고 곰탕을 사먹었는데, 가게에서 나와 햇볕 아래 서니 꼭 강한 항생제를 빨리 맞았을 때처럼 메스껍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논문 쓰다 이렇게 죽는 건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결국 수요일 저녁에 선생님께 문자가 왔다. 언제 볼 수 있냐고 물으시곤 짐짓 ‘논문 진도와 무관하게 말입니다’라고 덧붙이셨는데, 잠수 탄 제자에게 차마 논문 어떻게 되었냐 묻지 못하시는 마음이 느껴져 죄스러웠다.

면목이 없어 무거운 마음으로 연구실 문을 두드렸는데, 선생님은 94문 2항의 첫 번째 반론에 대한 나의 어려움을 들어주시고 왜 어려운지 이해해주시고 당장 못 푸는 건 일단 문제로 남겨놓고 넘어가야지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빨리 와서 이야기해야지 당신이 연락할 때까지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잔소리를 한 소절 하셨다. 4식당 2층에 가서 떡만두국을 먹었다. 평소 선생님과 함께하는 식사라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는데 오늘은 왜 이리도 맛좋은지... 그래서 왠지 또 울컥했다.

연구실 앞에서 월요일에 봅시다, 하는 말씀과 함께 헤어졌는데 뒤에서 스승과 제자의 런치타임을 은밀히 쫓고 있었던 봉 형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 커피나 마시러 가자고 했다.

연타석으로 감사합니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사에 대한 심사  (0) 2020.04.24
2020.04.23  (0) 2020.04.23
스마트폰의 죽음과 부활  (0) 2017.04.26
H 병원 517호 (1)  (0) 2017.01.29
칸트의 도덕철학  (0) 201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