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2020.04.23 본문

이야기

2020.04.23

primolevi 2020. 4. 23. 04:36

자는데 무언가 톡 하고 침대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할 만한 소리여서 무시하고 잤는데, 어느 순간 은근히 잠이 달아났다.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악의적인 장난에 속은 기분으로 깨서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2시 반이다. 

취침 시간이 자꾸 늦어지는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자꾸 생각이 연기처럼 솟아오르고 꼬리를 물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불면의 연쇄를 끊을 만한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새벽 5시가 넘어 창밖이 희뿌예질 때쯤 잠들었지만, 8시 반에는 일어났고, 아침부터 누나와 이케아에 갔고, 다녀 와서는 바로 학원에 가서 청소를 했고, 책을 만들었고, 끝나자 또 바로 누나네에 갔고, 조카들과 놀았고, 사돈이 해주신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고, 집에 돌아와서 10시 반에 잤으니 말이다. 아침까지 푹 자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4시간 만에 깨어 버린 것이다. 확인해 보니 책이 떨어져 있었다. 그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깨지 않았을까? 

 

자는 사이에 메시지가 와 있어서 답장을 하고 침이 흥건한 베갯잇을 갈았다. 

 

이케아행의 목표였던 전신거울은 마침 품절이었다. 대신 누나가 욕실 앞에 깔 러그를 사 주었다. 여름의 축제날에 머물렀던 숙소가 떠올랐다. 그곳에도 러그가 두세 종류는 깔려 있었고, 촉감이 폭신해서 좋지만, 관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데 우리는 의견이 일치했었다. 캔커피를 사서 골목 안의 문 닫힌 고깃집 앞,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담배를 나눠 피울 때 아침 햇살의 각도가 내게는 참 낯설고도 좋았다. 

 

2주 정도 되었다니까 “왜 재깍재깍 이야기를 안 하냐”고 했다. 재깍재깍이라는 걸 평생 모를 양반이 그런 소리를 한다.

 

새벽에 깨서도 다행인 것은 좋아해서 아껴두었던 작가의 책이 마침 어제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누군가가 된다는 게, 그리고 마음속으로 눈을 흘기면서도 그 뻔함을 모른 체해 주는, 그런 마음이 오고 가는 관계가 나는 정말 갖고 싶었다. 무엇을 읽든 내 마음은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하던 그 일로 되돌아간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내 기분이나 반응을 예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예측 불가능함 뒤에 눈흘김과 뻔함과 모른 체함이 뒤따르기는 어려웠다.

 

봄 공기 때문인지 걷다 보면 가끔 부분적으로 철거 중인 건물처럼 맘속에서 작은 돌덩어리들이 낙하하고 흙먼지가 인다. 나는 그 공사 현장의 인부처럼 햇볕을 쬐며 담배를 연달아 피우고 들어간다. 그래도 춥다. 오늘은 문득 그래 이제 2주 됐으니 더없이 그럴 만한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연하게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교훈이 피어날 자리를 엿본다.

 

그러나 책을 좀 읽다 보면 결국 더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떤 단어들은 연상시키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7.30. (목) (2)  (0) 2020.07.31
심사에 대한 심사  (0) 2020.04.24
이어폰과 떡만두국과 커피  (0) 2017.09.21
스마트폰의 죽음과 부활  (0) 2017.04.26
H 병원 517호 (1)  (0) 2017.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