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잘못되어야 또 한 번 거절당하는 것뿐이라 생각하고는 본문

잘못되어야 또 한 번 거절당하는 것뿐이라 생각하고는

primolevi 2021. 3. 7. 00:09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 「아연」, 82-83쪽

4학년 화학 과정에는 짧게나마 물리학 실험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점도나 표면장력, 회전력만을 측정했다. 그 시간은 젊은 조교가 맡아 지도했는데, 그는 큰 키에 말랐고 등이 약간 구부정했으며, 친절하면서도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의 행동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을 따랐다. 우리의 다른 선생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들이 가르치는 과목의 중요성과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중 몇몇은 그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개인적인 능력, 자기 사냥터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조교는 거의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듯한, 우리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약간 당황한 듯이 점잖게 냉소적으로 짓는 그의 미소는 “여러분들이 이 낡아빠진 고물 실험도구로는 어떤 유용한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것들은 쓸모없는 주변적인 것이고 지식은 딴 곳에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들과 나 역시 숙달할 수밖에 없는 직업적 기술이니까 너무 손해 보는 일은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배워두세요” 하고 말하는 듯했다. 요점만 말하자면, 그 수업을 듣는 모든 여학생들이 그에게 반했던 것이다.
그 몇 달 동안에 나는 이 교수 저 교수에게서 학생 조교 자리를 얻어내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했다. 교수 중 몇몇은 입을 삐죽이며 심지어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인종법이 그것을 금하고 있다고 대답해주었고, 또 몇몇은 모호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은 핑계로 대처했다. 네다섯 번 정도의 거절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난 뒤 어느날 저녁,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낙담과 비탄의 짐이 등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거의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맥이 빠진 채 발페르가칼루소 가를 따라 페달을 밟고 있을 때 발렌티노 공원에서부터 얼어붙은 안개가 휘몰아쳐와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새 밤이 되었고, 어둡게 보이도록 보라색으로 칠한 가로등 불빛은 안개와 어둠을 뚫지 못했다. 길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모두 서둘러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그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느릿하게 성큼성큼 걷고 있었는데, 긴 검정 외투를 걸쳤고 모자는 쓰지 않고 있었다. 걷는 모습이 약간 구부정한 게 조교 같아 보였다. 조교가 맞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의 곁을 지나갔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가던 길을 되돌렸지만 또다시 선뜻 그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대체 뭐였던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무관심한 사람, 위선자, 심지어 적일지도 몰랐다. 잘못되어야 또 한 번 거절당하는 것뿐이라 생각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연구소의 실험 일에 나를 써줄 수 있는지 물었다. 조교는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고, 내가 기대했던 장황한 이야기 대신 복음서에 나오는 두 단어로 답했다. “나를 따르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도, 『드래곤 라자』  (0) 2021.07.28
그렉 이건, 『쿼런틴』  (0) 2021.05.06
아르곤  (0) 2021.02.27
폴 오스터, 「유리의 도시」  (0) 2021.02.01
2020 알라딘  (0) 2020.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