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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re incerta
메시지와 분노 영화 감독이니 정치적 발언과 행동은 삼가고 작품만 만들라는 의견도 인터넷에서 몇 번 봤다. 나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당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1995년 처음 참석한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활동가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단상에 올라 프랑스 핵실험 반대 플래카드를 들었다. 시상식장에 있던 영화인 대부분은 일어나 박수를 쳤다. 솔직히 나는 어쩌면 좋을지 망설였다. 일어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박수를 쳐야 하나 야유를 보내야 하나. 이 축제의 공간을 그런 '불순'한 자리로 만들어도 될까 하고. 그러나 23년 사이에 깨달은 건 영화를 찍는 것, 그리고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나만 안전지대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는 건 어리광 섞인 오해..
퍼거슨은 이모와 이모부가 아기와 관련한 일에 착수해서 얼른 그를 위해 꼬마 사촌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상상 속 형제는 결국 한계가 있었고, 어쩌면 에들러 집안의 사촌은 , 혹은 아쉬운 대로 비슷한 뭔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그는 그런 발표를 기다렸고, 매일 아침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밀드러드 이모가 아기를 낳을 거라고 이야기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때 무슨 일이 생겼고, 예상치 못한 그 불행 때문에 퍼거슨이 조심스럽게 세운 계획은 모두 엎어지고 말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살면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고, 그 말은 두 사람이 그를 위해 사촌을 한 명 만들어 준대도 그 사촌이 이 될 일은 절대로 ..
내 식의 고향친정 쪽은 휴전선 이북이고, 시댁 쪽은 대대로 서울에서도 사대문 안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은근히 으스대는 서울 토박이라 명절이 돼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금년엔 좀 덜했지만 추석 때마다 전국의 도로란 도로가 엄청나게 정체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한테까지 그것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마치 집 없는 거지가 남의 집 불타는 걸 고소하게 구경하면서 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집이 없어 불날 걱정 안 해도 좋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했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거지 아범처럼 말이다. 마당에서 한때 하늘을 뒤덮을 듯이 무성하던 나무들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흙에서 ..
머리말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어느 세대나 자기 시대가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믿겠지만, 우리의 문제들은 특히 다루기가 어렵고 미래는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우리의 많은 난관 뒤에는 사실 더 깊은 정신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에 우리는 전례 없는 규모로 폭력이 분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서로 해치고 상처를 내는 능력을 우리가 이룬 특별한 경제적·과학적 진보에 뒤처지지 않고 함께 발전해 왔다. 우리에게는 호전성을 제어하여 안전하고 적절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둘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첫 원자폭탄은 현대 문화의 찬란한 성취 한복판에서 허무주의적 자기 파괴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제 우리는 땅을 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단순하게 ..
79-81 "혹시 잘 때 어금니를 꽉 물고 자는 버릇이 있나요?" 치과 의사 선생님은, 무방비로 입을 벌리고 있는 내게 물었다. 가끔 자고 일어나면 턱이 아플 때가 많고, 꿈에서 주먹다짐을 했나 싶을 때도 있고, 같이 사는 동생의 목격담에 의하면 끙끙 앓는 소리를 잘 낸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면서도 무엇을 견디느라 나는 힘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일까. 종종 몸이 느슨해질 정도로 쉬면 오히려 컨디션이 떨어지곤 했다. ... 등단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자취하던 집 근처의 식당에서 우연히 선배 시인을 만난 적 있었다. 선배는 나의 안부를 이것저것 묻다가, 그해 등단한 시인들을 조명하는 앤솔로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내 시가 수록되지 않고 같이 등단한 다른 시인의 시가 실리게 되..
pp.102-103 37킬로 부근에서 모든 것이 싫증 나버린다. 아, 이젠 지겹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내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난 것 같았다.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고 물을 마시게 되면 그대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도로 옆의 빈터에 흩어져서 행복한 듯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에게도, 차 속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가에게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셔터 소리가 너무 크다. 양의 수가 너무 많다. 셔터를 누르는 건 사진가의 일이고..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26230&custno=6935820
책을 선물 받았다. 좋아하는 작가여서 출간 소식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확인했었는데, 그때마다 왜 살 생각까지는 안 했었던가,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영 똑똑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책 보았냐는 질문에 아니, 하고 나서, 출간된 걸 모르지는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그동안 왜 굳이 보려고는 하지 않았는지, 말하려고 했는데, 또렷하게 할 말은 또 마땅히 떠오르질 않아서, 그래서 그냥 아니, 하고 멈춘 틈에, 선물로 보내 왔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는 걸 알고서 신경을 쓴 것일 터다. 읽다 보니 그 '왜'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한데, 애초의 '왜'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으므로, 사실 읽다가 떠오른 '왜'가 예전에 내가 떠올렸던 '왜'와 같은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