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본문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rimolevi 2022. 10. 5. 02:29

pp.102-103

37킬로 부근에서 모든 것이 싫증 나버린다. 아, 이젠 지겹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내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난 것 같았다.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고 물을 마시게 되면 그대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도로 옆의 빈터에 흩어져서 행복한 듯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에게도, 차 속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가에게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셔터 소리가 너무 크다. 양의 수가 너무 많다. 셔터를 누르는 건 사진가의 일이고, 풀을 뜯어 먹는 건 양들의 일인 것이다. 불평을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화가 난다. 피부는 어느새 작고 하얗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햇볕에 그을린 탓에 생긴 물집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더위다!

 

 

pp.106-107

이것이 나로서는 난생처음의 (거의) 42킬로 달리기였다. 그리고 그런 가혹한 조건 아래 42킬로를 완주하는 것은 고맙게도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해 12월 호놀룰루 마라톤을 꽤 괜찮은 기록으로 완주했다. 하와이도 더웠지만 아테네의 여름에 비하면 하와이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까닭에 호놀룰루가 나에게는 마라톤 풀코스 경주의 데뷔가 된다. 그 이래 매년 한 번씩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썼던 이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고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햇수와 거의 같은 횟수의 풀 마라톤을 완주한 지금도, 42킬로를 달리고 나서 내가 느끼는 것은, 처음 그리스에서 마라톤까지 달려갔던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마라톤을 할 때마다 대체로 여기에 쓴 것과 같은 심적 프로세스를 되풀이하고 있다.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 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