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서윤후,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본문

서윤후,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primolevi 2023. 1. 13. 16:12

<버티는 일> 79-81

 

"혹시 잘 때 어금니를 꽉 물고 자는 버릇이 있나요?"

치과 의사 선생님은, 무방비로 입을 벌리고 있는 내게 물었다. 가끔 자고 일어나면 턱이 아플 때가 많고, 꿈에서 주먹다짐을 했나 싶을 때도 있고, 같이 사는 동생의 목격담에 의하면 끙끙 앓는 소리를 잘 낸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면서도 무엇을 견디느라 나는 힘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일까. 종종 몸이 느슨해질 정도로 쉬면 오히려 컨디션이 떨어지곤 했다.

 

... 

등단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자취하던 집 근처의 식당에서 우연히 선배 시인을 만난 적 있었다. 선배는 나의 안부를 이것저것 묻다가, 그해 등단한 시인들을 조명하는 앤솔로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내 시가 수록되지 않고 같이 등단한 다른 시인의 시가 실리게 되었는데, 혹여나 상심이 크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시는 오래 쓰는 거라고, 멀리 보라는 말을 내게 해주었는데 식어가는 밥상 앞에서 나는 그 말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계속 버텨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 말이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십수 년이 흐른 뒤에 그 장면을 다시 돌이켜보면 의아하다. 책에 실려 있지 않은 나를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할 뿐더러, 그런 상심까지 헤아렸던 선배 역시도 언젠가 나와 같은 모퉁이에 서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조바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그때엔 견디는 일이 필요한 것임을 에둘러 말해준 게 아닐까 하고 이해해버린 것이다. 십수 년 만에 깨닫게 되는 일도 있다니. 견디는 것은 이렇게 보람된 일인가?

그럼에도 내가 견디는 일이나 버티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은, 꽉 쥐고 있던 어떤 손톱자국이나 이빨자국이 오래도록 몸에 남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영혼에. 그 안간힘이 좋은 힘줄이 되기도 하지만, 붙들고 있는 것만이 다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도 했으니까. 홀연히 떠나는 타이밍이, 놓아주는 느슨함이 더 큰 기다림을 버틸 수도 있게 하니까.

 

한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온 사람들을 보면 경이롭다. 버티는 동안의 얼룩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살았을지,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종종 물어보곤 했다. 무언가를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보다도, 그 버틴다는 사실이 무감각해지거나 녹슬지 않도록 계속 보듬어가는 사람의 말을 듣기도 한다. 버티다 보면 답이 있겠지, 그런 망망대해의 표류 속에서도 계속 믿음을 출렁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안간힘은 자신도 모르게 꽉 붙들게 꽉 붙들게 되고, 어떤 안간힘은 스스로 벼랑을 만들어 초인적인 순간을 일으키기도 한다. 버티고 있는 내게 계속할 수 있는 다독임을 주기 위해서는, 버티지 않아도 될 만한 일을 선별하는 깨끗한 지혜가 필요한데, 사실 이 책에 쓰는 이야기들이 아마도 그런 것을 찾아가기 위해 그만둔 것들이 아닐까.

 

<나를 소재로 말하는 진실함> 82-85

자신에 대하여 쓴다고 해서, 진실이 발설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파고 내려갈수록 덩이줄기처럼, 세계 전체가 끌려나온다. 가족과, 친구와, 애인과, 적과, 타자와 사물과 관념과 물질이 끌려나온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는 그것은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 만든 아상블라주다.

― 김홍중, 『은둔 기계』

 

문학을 기웃거리면서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여전히 하지 못하는 말도 있지만, 시나 산문을 쓰면서 나를 꺼내오는 일이 반복되었으니까. 어떤 '나'는 너무 많이 들춰서 너덜너덜해졌고, 어떤 '나'는 아주 새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나'는 나보다 더 잘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고, 또 어떤 '나'는 살면서 희미해지거나 영영 사라지게 되었다.

친구가 내게 고백했던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겪어온 불온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못다 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친구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무척 기뻤다. 그 비밀을 지켜주면서, 그림자처럼 떨어져 있는 친구의 진실까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눈물로 반짝이는 밤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자주 말하였다. 나만 알고 있으리라는 순진한 마음을 접어야 했던 것은, 너도, 나도 다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처럼 달느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이 비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비밀을 나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와 쉽고 간편하게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쉽게 꺼내오는 사람이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 뒷모습에서 나를 본 것 같기도.

 

비밀을 고백하는 사람의 진실됨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내게 마음을 기울였으니, 나도 그만큼 기울여 말하게 되는 어떤 내밀한 이야기가 있고,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끈끈하게 엉키게 되는 것을 우정이나 의리로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어둡고 외로운 것을 고백하면 쉽게 가까워지게 된다는 것을, 빨리 잊고 싶었다. 나의 슬픔을 전시해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일로 내 외로움을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 

종종 주변 사람들은 내게 "너는 네 이야기를 잘 안 하잖아" 하고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내 이야기를 계속해왔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다소 의문스럽다. 정말 내가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물론 사람들이 다 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니까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고 시로 옭아맨 진실의 자리를 들여다본다. 새카만 구멍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하고, 나를 대신해 나의 은유로 태어난 것들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한다. 

 

김홍중 선생님이 쓴 문장을 오랫동안 되뇌곤 했다. "자신에 대하여 쓴다고 해서, 진실이 발설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내게로 꽂힌 이유는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일까.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언제나 진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수단이나 방법이 되면서 진실이 탄로날까 두렵다면 그것은 과연 진실일까. 

내가 시인들의 첫 시집을 애정하는 이유는, 그 첫 시집을 위한 행보가 다난했을 것임을 헤아려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첫 시집에서 길어올린 그 사람의 세계 전체가 함께 끌려 나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구덩이를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우리가 결코 쉽고 간단하게 태어나 살고 있지 않다는 나란함을 위로로 삼을 수도 있고, 그 덩이줄기에서 무엇을 끊어내고 갈 갈 것인가, 무엇을 다시 심을 것인가의 행보를 지켜보기에 좋은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만난다는 점에서 시인의 첫 시집은 고백의 아상블라주가 아닐까.

 

내게만 말한다고 해놓고선, 다른 친구에게서 너의 진실이나 내밀한 비밀을 듣게 되면 배신감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상대에게 기대하는 진실이었을 뿐, 정작 그 사람의 진실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를 토대로 진실됨을 연기하면서 누군가와 가까워지겠다고 마음먹는 어떤 외로움이 눈뜰 때마다, 나는 그 마음을 더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구겨 넣거나 욱여넣듯이. 슬픔을 자랑하듯 떠들고 다녔던 시절과 상처가 영웅담처럼 보였던 시절이 모두 지나가고,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까지 그 구덩이를 배회한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날까지, 나의 진실이 나를 몰라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