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이영도, 『드래곤 라자』 본문

이영도, 『드래곤 라자』

primolevi 2021. 7. 28. 21:29

제4권 제7장 「항구의 소녀」 pp.90-94

 

"아, 예. 저, 그리고 고마워요. 핸. 살려줘서."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는다. 죽기 직전에라도 웃음을 지어야 남자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건 그저 나의 왕, 루트에리노 전하를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페어리퀸 당신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예? 무슨 말입니까"

"당신 덕분에 암살이 실패한 이상, 난 살아 있는 것이 주군께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다레니안은 앞쪽 말에 창백해졌다가 곧 뒤쪽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살아나려면, 그 진지 안에서 내 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 낫겠지요."
"당신이 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다레니안은 잠시 말을 멈춘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본다. 예고 없이 그녀의 입이 열린다. 

"도대체 왜 사는 거예요!"

다레니안의 짜랑짜랑한 목소리. 물론 크지는 않지만 핸드레이크의 얼굴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 핸드레이크에겐 천둥소리나 다름없다. 핸드레이크는 땅에 뺨을 가져다댄 채 옆으로 선 것처럼 보이는 다레니안을 바라본다. 

"왜, 무엇 때문에 사는 거예요! 100년도 살지 못할 인생이면서, 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요!"

"다레니안......."

다레니안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내가, 내가 왜 드래곤 로드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지 알아요?"

"물론 날 체포되게 하려고 했겠지요."

"그래요! 그래야 당신이 죽지 않을 테니까! 오후에 당신 얼굴엔 모두 다 드러났어요. 당신이 죽을 생각이라는 것 알아차렸죠.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어요. 당신이 체포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멍청한 잇아도 모두 버리고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습니까?"
갑자기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손가락을 쥔다. 그녀는 낮지만 열성적인 어투로 말한다. 

"핸.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자기를 위해 살아요. 당신이 루트에리노를 도와 왕국을 세울 수도 있어요. 그 왕국이 수천 년간 번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수천 년 후를 살지 않아요. 다른 사람 대신에 사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세운 왕국도 영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왜 가장 소중한 목숨을 쓸데없는 것 때문에 희생하려는 거죠?"

"쓸데없는 것......."

"그래요. 당신이 대륙 최고의 왕국을 세우고, 아니, 대륙을 아예 통일할 수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과연 제대로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격한 고통으로 신음이 흘러나오지만 핸드레이크는 언덕 위에 정좌한다. 밤바람이 그의 뜨거운, 그러나 차가운 뺨을 스친다. 

핸드레이크는 손바닥을 내밀어 다레니안을 올라타게 한다. 핸드레이크는 손을 다리 위에 올려 다레니안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다레니안은 느닷없는 질문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본다. 다레니안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을 하고 있어요."

이번엔 핸드레이크가 당황한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타 있는 요정의 여왕을 내려다본다.

"날 사랑합니까."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핸드레이크는 눈을 들어 다레니안을 외면한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먹구름이 걷혔는지, 밤하늘엔 루미너스의 빛이 반짝인다. 핸드레이크는 달을 보며 말한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예?"

"우리는 인간입니다. 당신 같은 페어리나 조화의 엘프가 아닙니다. 더군다가 독단의 드워프도 아닙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는 하나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주군의 신하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친구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참모장 핸드레이크, 클래스 9의 마법의 마스터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의 철천지 원수인 핸드레이크,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한다. 

"고귀한 페어리퀸의 사랑을 받는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붉어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무정한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아래를 향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달을 향해 말한다. 밤기운이 차갑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참지 못하고 말한다.

"무슨 말씀이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총애를 동시에 받습니다. 원래 불안하죠. 우리는 관계 속에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부러워한다 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페어리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인간에게 있어 나는 하나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수형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다면적이고 여럿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왜죠? 왜 안 된다는 거죠? 굴뚝새에서부터 크라켄까지, 페어리에서부터 악마까지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요. 그런데 왜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이죠."

다레니안은 얼빠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 본다. 핸드레이크는 침울하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는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는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상 최초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레니안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 눈앞의 핸, 그것일 뿐이잖아요? 핸을 사랑하려고 수많은 핸을 찾아낼 필요는 없어요. 여기, 언덕 위에 앉아 있는 핸이잖아요! 나를 들고 있는 핸이잖아요. 드래곤 로드가 당신을 죽이려고 그 많은 핸을 일일이 하나씩 죽이지는 않잖아요! 드래곤 로드는 오로지 여기 있는 이 핸만을 죽이면 그많이잖아요! 마찬가지예요. 나도 그 많은 핸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여기 있는 이 핸만 사랑해요."

핸드레이크는 드디어 얼굴을 내려 다레니안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을......."

다레니안은 충격에 말을 잃는다.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한 채 두 번째로 앞으로 기울어진다. 다레니안은 크게 외친다.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