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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여행기

primolevi 2022. 10. 14. 03:41

친구를 보러 울산에 갔다.

잘 보지도 않는 넷플릭스 아이디를 같이 쓰고 있었는데,

어느덧 그의 어머니, 그의 매형까지 합류하셔서

졸지에 남의 집 안마당에 발 뻗고 누운 모양이 되었다.

철저히 그가 주인인 계정이어서(내 몫은 내가 내고, 나머지 세 사람 몫을 그가 내는 듯하다),

그와 나는 이름으로 적히고, 어머니는 '어머니', 매형은 '매형'이다.

 

어느 날 밤 그가 생각이 났다.

가도? 했더니, 언제든, 이란다. 백수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다.

 

저녁쯤 도착해서 맥주나 한 잔 하고 이야기나 하려 했는데,

대뜸 울산에서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한다. 

(울산에는 예전에 아버지께서 회사 일로 가 계셨지만, 나는 가 본 적도 아는 바도 없다.

그래서 나도 대뜸, 그의 호기에 지지 않으려) 울산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냐 했더니

맞다, 울산에는 볼 게 아무것도 없단다. 

그래도 뭔가, 친구는 열심히 여행 동선을 짜는 눈치다. 

그런 일에는 늘 열심이었다.

나는? 늘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편이었다.

 

그런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1.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친구가 식당 주인분께 택시는 어디에서 탈 수 있는지 묻자,

콜택시 불러드릴까예 하신다.

네. 했더니. 식당 안쪽이 한참 분주해지더니,

안쪽에서 요리를 담당하시던 진짜 사장님(서빙하시던 분의 어머니로 보였다)께서 가게 밖으로 나오셔서,

약간, 우리더러 들으라는 듯 통화를 하셨다.

'어, 오늘은 일을 안 한다고? OO이도 오늘 일 안 하나? 하긴 일 해도 여기까지 오긴 힘들겠지?'

전화를 끊은 사장님은 우리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낭패의 원인과 사연을 이미 알게 되었다.

 

아는 동생 중 택시 운전을 하는 이에게 직접 전화해서 차량을 물색하는 것도,

단 한 대의 후보가 이용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콜 택시'이긴 하지? ㅋㅋㅋ

나는 이 풍경이 왠지 너무 순박하게 느껴져서 몰래 웃었다.

 

2. 울산 대곡 박물관의 프론트에는 직원 세 분이 앉아 계셨는데, 우리가 떠날 때까지 관람객은 그와 나 둘뿐이었다.

특별히 환영받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겸연쩍었다. 

 

예전에 콜로퀴움에 참석하기로 한 동료들이 당일에 하나 둘 못 온다고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 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나 혼자 발표한 날이 있었다.

부랴부랴 연락을 돌리는데, 그가 응답했다.

그는 누가 왔느냐고 했고, 나는 나 혼자뿐이라고 했다. 

그는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 혼자 먹었을 욕을 나누어 먹기 위해 뒤늦게 왔다.

언제든 시간이 되는 백수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단 말이다.

끝나고는, 녹두로 내려가서 둘이 맥주를 마셨던 것 같다.

 

3. 

천전리 각석을 보러 갔더니, 안내소의 아주머니께서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셨다.

친구가, 자기는 울산에 살고, '이 친구'는 경기 남양주에서 왔다고 했다.

친구를 안 지 올해로 10년 차인데, 나를 '친구'로 지칭하는 건 내 기억에 처음이었다.

 

조 형이 석사 학위를 받아서 임 형과 그, 그리고 나까지 넷이서 모이기로 한 자리에 나는 수업이 있어서 늦었다.

형들이 사주는 돼지고기는 언제나 맛있었다.

02번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그는 혀가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로 어디냐고 물었다.

가서 봤더니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셋이서 벌써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뒤였다.

그때 그는 전화로 '형 어디예요?' 했었다. 그가 'OO 씨' 외의 호칭으로 나를 부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이 주기대로라면 앞으로 10년 뒤쯤, 그에게서 'OO 씨' 아닌 새로운 호칭으로 불릴 사건이 생기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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