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본문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primolevi 2020. 4. 19. 01:40

 

 

1. 「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에서 외계인들의 우주선은 지구 궤도상에 느닷없이 출현하였고, 반원형 거울처럼 보이는 거대한 인공물들이 전 세계 지표면 위에 총 백열두 개나 나타났다. 그것들은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의 쌍방향 통신을 위한 장치였고, 사람들은 그것들에 "체경looking glas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체경이 활성화되면 그 너머로 방 하나가 보였고, 이어 방문을 열고 외계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음성언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부와 군 당국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언어학자 한 사람과 물리학자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팀을 각 체경마다 파견하여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을 시도하게 했다. 소설의 화자는 그 중 하나의 체경을 담당하게 된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스로서, 그녀는 물리학자인 게리 도널리와 짝을 이루게 되었다. 

루이즈가 외계인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외계인들은 "일곱 개의 가지가 맞닿은 지점에 올려놓은 통처럼 보였다. 방사상으로 대칭이었고, 가지는 모두 팔이나 다리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네 다리를 써서 걷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가지는 팔처럼 측면에 말려올라간 상태였다."(p.161) 게리는 그리스어에서 일곱이라는 뜻을 갖는 단어('hepta')와 발이라는 뜻을 갖는 단어('pod')를 가져와 외계인들을 '헵타포드'라 불렀다. 

 

1.1. 헵타포드의 언어

 

콰인식 원초적 번역의 상황에 놓인 루이즈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외계인들과의 첫 대화를 시도한다.

 

나는 나 자신을 가리키고 천천히 말했다. “인간.” 그러고는 게리를 가리켰다. “인간.” 그런 다음 각 헵타포드를 가리키며 한 번씩 말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반응은 없었다. 나는 같은 일을 되풀이했고, 한 번 더 되풀이했다.

헵타포드 하나가 일곱 개의 가지 중 하나를 써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 끝에 달린 네 개의 손가락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운이 좋았다. 어떤 문화에서는 사람을 가리킬 때 턱을 쓴다. 헵타포드가 칠지 중 하나를 쓰지 않았다면 어떤 제스처에 주목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짧게 퍼덕거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고, 동체 꼭대기의 오므라진 구멍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헵타포드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자기 동료를 가리키고는 다시 퍼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p.161-2)

 

루이즈는 음향분석기를 통해 헵타포드가 자신과 자기 동료를 가리키면서 낸 소리를 분석하고서, 두 개의 음향패턴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이 루이즈와 게리를 모두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헵타포드의 첫 번째 발화는 두 헵타포드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종의 이름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에서 사물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 여러 동작이나 자세에 대응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나아가 그들의 문자 언어도 배워 나가기 시작한다. 

루이즈는 곧 헵타포드 언어의 특이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헵타포드의 음성 언어는 인간의 언어처럼 명사나 동사에 해당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순이 완전히 자유롭기는 했지만, 우리 언어의 격표지에 해당하는 것이 있어 의미가 한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자 언어의 경우 상황이 달랐다. 

 

"저들의 문자는 단어로 분할되어 있지 않아요. 구성 단어들에 해당하는 어표를 결합해서 문장을 표기하고 있어요. 회전시키고 수정하면서 어표들을 결합시키는 거예요. 이걸 봐요." 나는 그에게 어표들이 어떻게 회전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한 단어가 어떤 식으로 회전해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게리가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헵타포드들을 바라보았다. "몸이 방사상 대칭이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몸에 '전방'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글자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어요. 고도로 근사한 방식이로군." (p.174)

 

헵타포드의 글에서도 각각의 단어에 대응하는 어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어표들은 인간처럼 선형적이고 순차적으로 나열되지 않았다. 우리 인간의 언어는 왼쪽에서 오른쪽이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혹은 위에서 아래이든 일정한 방향성을 갖는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 체계 내에서 A와 ∀는 같은 문자가 아니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글에서 하나의 어표는 다른 어표들과 결합하기 위해 회전과 수정을 겪었고, 그리하여 하나의 문장에서는 A의 형태로 있던 것이 다른 문장에서는 뒤집어져서 ∀의 형태로, 혹은 그밖의 형태로 다른 어표들과 결합되고 있었다. 

헵타포드의 글은 방향성이 확정되어 있는 어표와 어표의 순차적인 결합이 아니었다. "행行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선형이나 선형적인 방식과도 거리가 멀었다." 헵타포드는 "필요할 때마다 어표들을 갖다붙여 거대한 복합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하곤 했다." 단어와 단어는 하나의 선 위에 순서대로 놓이는 대신 방향을 바꾸고 형태를 수정하면서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들의 글은 전혀 글 같지가 않았고, 오히려 정교한 그래픽 디자인의 집합체처럼"(이상 p.175) 보였다.

루이즈가 헵타포드의 언어에서 발견하게 된 결정적인 특성은 그들의 음성언어와 문자언어가 서로 조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헵타포드의 음성언어에서 명사는 그것이 주어인지 목적어인지를 나타내는 격표지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문자언어에서 명사는 동사를 나타내는 어표의 방향에 따라 주어인지 목적어인지를 알 수 있어요. 자, 여기를 봐요." 나는 문자 집합체 하나를 가리켰다. "예를 들어 '헵타포드'라는 단어가 '듣는다'라는 단어와 여기 이런 평행선과 함께 이런 식으로 통합되어 있는 경우, 이건 이 헵타포드가 듣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걸 표현해요." 나는 게리에게 다른 집합체를 보여주었다. "여기 이런 수직선들과 함께 이런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경우에는 해당 헵타포드의 말이 누군가에게 들리고 있다는 뜻이고요. 이런 식의 어형 변화는 다른 동사 몇 개에도 적용돼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굴절 체계가 있어요." 나는 다른 장면을 불러냈다.

"그들의 문자언어에서 이 어표는 대략 '쉽게 듣는다' 내지는 '또렷하게 듣는다'라는 뜻이에요. 이것과 '듣는다'라는 어표 사이의 공통점들이 보여요? 이것 역시 아까 같은 방법으로 '헵타포드'라는 말과 결합시켜서 헵타포드가 뭔가를 또렷하게 듣는다든지, 헵타포드의 말이 또렷하게 들린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흥미로운 건 '듣는다'에서 '또렷하게 듣는다'로의 변화가 특별한 예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들이 적용하는 변형을 알아볼 수 있겠어요?"

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가리켰다. "중간 획들의 곡선을 변화시켜서 '또렷하게'라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군요."

"맞아요. 그런 식의 변화는 많은 동사에 적용시킬 수 있어요. '보다'의 어표는 같은 방법을 써서 '또렷하게 보다'라고 변화시킬 수 있고, '읽다'나 그 밖의 동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이 획들의 곡선을 바꾸는 것은 그들의 발화에서는 조응하는 것이 없어요. 대신 동사에 접두사를 붙여서 상황의 용이함을 나타내죠. (pp.178-9)

 

예컨대 헵타포드의 음성언어에서 '또렷하게 듣는다'는 동사 '듣는다'에 접두어를 붙이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언어에서 '또렷하게 듣는다'는 단지 '듣는다'를 표현하는 어표를 이루는 선의 모양을 바꿈으로써 표현된다.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문자언어는 음성표시 언어이다. 글자는 말소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음성언어로는 음성표시 언어를 사용하면서 문자 언어로는 이를테면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사선을 그어넣음으로써 '출입금지'를 표시하는 것처럼, 음성과 아무런 조응 관계를 갖지 않으며 단지 의미만을 표현하는 의미표현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의미표현 언어는 수학 방정식이나 음악과 무용의 표기법처럼 표현할 의미의 가짓수가 제한되어 있는 영역에서만 사용되며, 그런 것들을 써서 우리 대화를 모두 기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문자언어는 말하자면 "완성된 하나의 범용 그래픽 언어"로서, 그들의 음성언어와 분리되어 있다. 자연히, 게리는 루이즈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잠깐만요. 하나면 충분할 걸 가지고 왜 두 개의 언어를 쓰는 거죠? 필요 이상으로 습득을 어렵게 만드는 듯한 인상인데."

"영어 철자법이 그렇죠?" 나는 말했다. "언어 진화에서 습득의 용이함은 1차 요인이 아니에요. 헵타포드의 경우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은 아마 굉장히 다른 문화적, 인지적 역할을 수행할 거예요. 그 때문에 별개의 언어를 쓰는 편이 같은 언어의 두 가지 형태를 쓰는 것보다 더 논리적인지도 몰라요." (p.180)

 

헵타포드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사이의 간격은 이후 게리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의 발견에 힘입어 그 이유가 설명된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문자언어가 갖는 특성에 관한 루이즈의 발견을 조금 더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문자언어가 음성언어와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문자언어를 표어문자로 부르기를 거부하고, 대신 '어의문자語意文字'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어의문자는 인간 언어의 문자와 대략 조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체적인 의미를 가졌고, 다른 어의문자들과 결합함으로써 무한하게 서술을 생성할 수 있었다.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 언어의 '단어'에 대해서도 만족할 만한 정의가 내려진 적은 아직 없는 것이다. 그러나 '헵타포드 B'의 문장에 들어서면 사정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이 언어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갈라주는 구두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구문構文은 어의문자들이 조합하는 방식에 드러나 있었고, 발화의 억양을 나타낼 필요는 없었다. 주부-술부 조합만 완벽하게 떼어내서 문장을 구성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헵타포드에게 '문장'이란 몇 개이든 좋으니 당사자가 결합하려고 마음먹은 어의문자들인 것 같았다. 문장과 단락, 문장과 페이지의 차이는 크기의 차이일 뿐이었다. (pp.182-3)

 

단어 수준에 대응하는 문자들이 있고, 그것들이 결합함으로써 서술을 생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문자와 동일하지만, 문자들이 결합하여 문장이나 그보다 더 큰 의미 단위를 만들어낼 때 우리가 문자들의 배치 순서나 구두점을 사용하는 반면, 헵타포드는 문자들의 조합 방식 자체에 의존한다. 루이즈는 언어학자들이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에서 "유례없이 2차원적인 어형 및 문법 변환 절차"를 발견하였다고 보고한다. 이러한 방식에 따르면

 

해당 어표가 속한 어형 변화군에 따라, 어떤 획의 곡률이나 두께, 혹은 굴곡 방식에 변화를 줌으로써 굴절을 나타내는 식이었다. 혹은 두 어근의 상대적 크기에 변화를 준다든지, 두 어근과 또 다른 어근 사이의 상대적 거리나 방향에 변화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방법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비분절적인 문자소로서, 해당 어표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될 수 없었다. … 문자소들의 의미는 일관되고 명확한 문법에 의해 정의됐다. (pp.185-6)

 

라틴어에서 '칭찬하다'의 뜻을 갖는 단어의 어간은 'laud-'이다. 1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을 표현할 때, 그리하여 '나는 칭찬한다'를 쓸 때에는 어미 '-o'를 써서 'laudo'로 표현하고, 3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을 표현할 때, 그리하여 '그들은 칭찬한다'고 쓸 때에는 어미 '-ant'를 써서 'laudant'라고 쓴다. 어형 변화는 어근에 달라붙는 어미의 변화를 통해 표현되며, 이를 굴절이라 부른다. 가까운 예로 영어에서 인칭대명사 'you', 'your', 'yours'의 변화와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언어에서는 굴절을 표현하기 위해 어표 자체를 달리 쓰는 것이 아니라, 즉 이를테면 '-o' 대신 '-ant'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간 'laud-' 자신을 구성하는 "획의 곡률이나 두께, 혹은 굴곡 방식에 변화", 혹은 어근의 상대적 크기나 어근 간의 거리나 방향을 통해 굴절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방식 전체가 문법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헵타포드의 문장이 얼마나 복잡하게 보일지 짐작할 수 있다. 

 

'헵타포드 B'의 문장의 크기가 아주 커지면 그 시각적 효과는 놀랄만했다. 해독하려는 의도가 없으면 초서체로 그린 기상천외한 사마귀들의 집합처럼 보였다. 마치 에스허르가 그린 격자무늬처럼 서로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각자가 조금씩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사이키델릭 포스터를 보는 듯했다. (p.183)

 

그런데 헵타포드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루이즈가 헵타포드에게 완성된 글이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발견된다. 그녀는 그들이 글을 쓰는 과정을 녹화한 뒤,

 

재생 버튼을 누르고 검은 거미줄 같은 선이 어의문자들로 이루어진 그물을 자아내는 광경을 응시했다. 나는 테이프를 되감고 재생하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마침내 나는 처음 획이 완성되고 두 번째 획이 시작되기 직전에 테이프를 정지시켰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구불구불한 선뿐이었다.

완성된 문장과 최초의 획을 비교하며, 나는 이 획이 메시지에 포함된 몇 개의 다른 구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획은 처음에는 '산소'를 의미하는 어의문자에서 다른 몇몇 원소들과 그것을 구분하는 한정사로 기능했고, 그다음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두 개의 달의 크기에 관한 묘사에서 비교의 기능을 담당하는 형태소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폭이 넓어지면서 '바다'를 의미하는 어의문자의 아치 모양 등골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획은 하나의 연속된 선이었고, 플래퍼가 가장 먼저 쓴 획이었다. 이것은 헵타포드가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문장의 다른 획들도 여러 개의 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들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도 밀접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라도 빼려면 문장 전체를 다시 디자인해야 했다. 헵타포드들은 문장을 쓸 때 어의문자를 하나씩 차례로 쓰지 않았다. 대신 개개의 어의문자에 구애받지 않고 휘갈긴 몇 개의 획을 사용해 문장을 구성해나갔다. 이런 고도의 통합 방식은 캘리그래피식 디자인, 특히 아라비아어를 쓰는 경우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러나 그런 디자인에는 숙달된 캘리그래퍼에 의한 면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했다. 그 누구도 대화 속도에 맞춰 이토록 정교한 디자인을 자아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인간은 그럴 수 없었다. (pp.197-8)

 

'헵타포드의 글은 순차적으로, 분절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문장을 쓸 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긋게 되는 획, 즉 '헵타포드'의 'ㅎ'을 쓰기 위한 3개의 획 중에 모자 위에 작게 그려지는 가장 첫 획은 '헵'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데에만 쓰일 뿐, 이후 문장의 나머지 모든 구성요소들을 쓰는 데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다. 각 획의 영향력은 그 획이 구성하는 개별 어표를 표현하는 데서 완전히 종료된다. 예외적인 경우로 가령 사인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단어를 구성하는 획을 다른 단어에까지 연결하는 경우를 들 수는 있겠지만, 이런 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헵타포드는 그들의 모든 글을, 심지어 그것이 단지 문장 단위가 아니라 문단이나 페이지, 혹은 책 한 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표현하기로 마음 먹은 글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도록, 최초의 획이 마지막 단어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루이즈가 말하듯 "이것은 헵타포드가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며,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방식이다. 헵타포드는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며, 음성 언어와 분리하여 굳이 왜 이런 방식으로 문자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그 비밀은 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도움을 받아 조금씩 풀리게 된다.

 

1.2. 페르마의 원리

 

언어 분야의 연구가 차근차근 진행되어 가고 있는 반면,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좀처럼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게리는 다른 지역의 체경에 배정된 물리학자가 전해 준 성과가 있다는 소식을 루이즈에게 전한다. 헵타포드들이 페르마의 최소시간의 원리에는 반응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공기에서 물속으로 이동하여 들어갈 때 빛은 수면에 달할 때까지는 일직선으로 나아가다가, 물의 굴절률이 공기와 다르기 때문에 수면에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빛의 이 경로에는 흥미로운 특성이 있는데, 바로 그 경로가 빛의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것이다. 만약 빛이 공기에서 물을 지나면서 어떤 굴절도 겪지 않는다면, 길이로 놓고 치면 빛의 실제 경로보다 더 짧을 것이다. 그러나 빛은 공기보다 물속에서 더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실제 경로보다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반대로 빛의 실제 운동보다 더 큰 각도로 수면에서 굴절하도록 경로를 그린다면 물속에 있는 부분의 비율이 줄어들지만 전체 길이가 늘어나서 그 경우 역시 실제 경로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 달리 말해, 빛은 언제나 최소 시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따라 운동하며, 이를 '페르마의 최소시간의 원리'라고 부른다.(pp.188-190)

루이즈는 게리의 이와 같은 설명에 물음을 제기한다. 

 

"근사한 건 맞지만, 지금까지 왜 아무도 나한테 페르마의 원리 얘기를 귀띔해주지 않은 거야?" 나는 바인더를 집어들고 게리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거기 철해놓은 문서에는 헵타포드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제안된 물리학 논제들에 관한 기초적 설명이 들어 있었다. "여기엔 플랑크 질량이니 수소 원자의 스핀 반전이니 하는 얘기만 잔뜩 있고, 빛의 굴절에 관한 얘기 따윈 단 한 마디도 없잖아." (pp.190-1)

 

게리는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 알아야 하는 내용에 관해서 우리가 잘못된 추측을 했던 거야." 게리는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사실, 페르마의 원리가 최초의 돌파구를 제공해줬다는 점은 흥미로워. 설명하기 쉬운 건 사실이지만, 수학적으로 이걸 기술하기 위해서는 미분이 필요하거든. 그것도 보통 미분이 아니라 변분법이. 우린 기하나 대수의 단순한 정리가 돌파구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정말 흥미롭네. 무엇이 단순한지에 대한 헵타포드의 생각이 우리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난 페르마의 원리에 대한 그들의 수학적 기술을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만약 헵타포드식 변분법이 그들의 대수학보다 더 단순하다면, 우리가 물리학에 관해 소통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가 설명될지도 몰라. 그들의 수학 체계 전체가 우리 것과는 완전히 반대일 가능성도 있는 거야." 게리는 물리학 책자를 가리켰다. 

 

헵타포드에게는 우리에게 가장 쉬운 것으로 여겨지는 기하나 대수의 단순한 정리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잡하고 어려운 변분법의 원리가 더 단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게리는 사실 페르마의 원리를 최소시간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는 불완전하거든. 어떤 상황에서 빛은 다른 가능한 경로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택하니까 말이야. 따라서 빛은 언제나 극치極値의 경로, 바꿔 말하자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든지 아니면 최대화하는 경로를 택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해. 최소와 최대는 어떤 수학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이 두 상황 모두 하나의 방정식을 써서 나타낼 수 있지.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페르마의 원리는 최단 원칙이라기보다는 '변분' 원리 중 하나에 해당해."

 

빛은 최소 혹은 최대라는 극치의 경로를 택하며, 이는 하나의 방정식, 하나의 변분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페르마의 원리에 의해 돌파구가 열린 뒤, 물리학자들은 헵타포드의 물리학 체계가 실제로 우리의 것과는 반대였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복잡한 것, 예컨대 "인간이 적분학을 써서 정의하는 물리학적 속성들"(p.194)이 그들에게는 기본적인 것이었고, 

 

역으로, 인간이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속도 따위의 속성들을 정의할 때 헵타포드들은, 게리가 확인해준 바에 의하면, '고도로 괴상한' 수학을 이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결국 헵타포드의 수학과 인간의 수학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각자가 거의 정반대의 접근법을 채택하고 있기는 했지만, 양쪽 모두 동일한 물리적 우주를 기술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p.194)

 

루이즈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물리학자가 아닌 우리처럼, 페르마의 원리가 물리학 법칙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리의 눈에 재미있어하는 빛이 떠올랐다. "당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 "당신은 빛의 굴절을 인과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어. 수면에 도달하는 것은 원인이고, 그 방향이 바뀌는 것은 결과라는 식이지. 페르마의 원리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빛의 행동을 목표 지향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치 광선에 대한 계명誡命의 느낌이랄까. '네 목표로 갈 때는 도달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할지어다'하는 식으로 말이야."

나는 이 말에 관해 곰곰이 생각했다. "계속해봐."

"그건 물리 철학의 오래된 의문이야. 페르마가 1600년대에 그걸 처음 법칙화한 이래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지. 플랑크는 관련 저서까지 여러 권 썼어. 문제의 쟁점은, 물리 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 같은 변분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이기까지 하다는 점이야."

"흠. 흥미로운 제기 방식인데? 조금 생각해볼 테니 잠깐 기다려봐." 나는 사인펜을 꺼내서 종이 냅킨 위에 게리가 내 칠판에 그렸던 것과 똑같은 도식을 그렸다.

"좋아." 나는 소리 내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그럼 이 광선의 목표는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하는 것이라고 해. 빛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 거지?"

"그게, 의인화를 통해 확대해석을 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 걸릴지 계산해야 해. …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다면 가장 빠른 경로도 바뀔 테니까."

게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지. 그리고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를테면 수면이 어디 있는지 등의 정보도 필요해."

나는 냅킨에 그려진 그림을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광선은 그런 것들을 사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해. 움직이기 전에. 맞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실을 곱씹었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pp. 199-201)

 

빛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은 루이즈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제 루이즈도 우리도 헵타포드가 왜 우리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단순성을 이해하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문자언어 체계를 받아들이는지에 관해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

 

1.3. 인과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

 

우리 인간은 무엇보다 시간 안에 종속된 존재로서, 사건을 순차적으로, 그리하여 인과적 맥락에서 생각하게 된다. 

 

게리가 페르마의 원리에 관해 내게 처음 설명해주던 날, 그는 거의 모든 물리 법칙은 변분 원리로 기술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물리 법칙을 생각할 때 인류는 인과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편을 선호한다. 이것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운동에너지나 가속도처럼 인류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은 모두 주어진 한 시점時點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런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어떤 순간이 다음 순간을 낳고, 원인과 결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헵타포드에게 있어서 단순한 것은 그 반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목적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일어나야 할 결과의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의식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알려진 미래를 향해 현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앎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헵타포드가 바로 그러한 존재임을,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헵타포드 B'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전, 나의 기억은 극미의 담뱃불처럼 타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의 의식 — 순차적인 현재에 머물러 있는 — 이 만들어내는 한 줄기 담뱃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헵타포드 B'를 습득한 다음에는 새로운 기억들이 거대한 블록들처럼 자리에 맞아들었다. 각각의 블록은 몇 년 동안의 기억에 해당됐다. 이것들은 순서대로거나 연속적으로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곧 오십 년에 걸친 세월의 기억을 형성했다. 이것은 내가 '헵타포드 B'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언어를 숙지하고 있는 기간이며, 플래퍼와 래즈베리와의 인터뷰로 시작해서 나의 죽음으로 끝난다. 

보통 '헵타포드 B'는 단지 내 기억에만 영향을 끼친다. 나의 의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간 선을 따라 기어가듯이 전진하는 가느다란 담뱃불이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억의 재가 뒤뿐만 아니라 앞쪽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진짜로 타오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헵타포드 B'가 진정한 우위를 점하면서 일별의 순간이 올 때,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나의 의식은 시간 밖에서 타다 남은 반세기 길이의 잿불이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 나는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한다. 이것은 나의 남은 생애와 너의 모든 생애를 포함하는 기간이다. (p.223)

 

우리가 세계를 순차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헵타포드는 세계를 동시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목적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빛이 한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이제 루이즈는, 그리고 우리는 헵타포드의 문자언어가 왜 그러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역시 이해할 수 있다. 

 

… 이런 문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헵타포드들이 왜 '헵타포드 B'와 같은 의미표시 문자 체계를 발달시켰는지 이해가 됐다.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가진 종에게는 그쪽이 더 편리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한 단어 뒤로 다음 단어가 순차적으로 뒤따라야 하는 음성언어는 병목 현상을 일으킨다. 반면 문자를 쓸 경우에는 한 페이지 위에서 모든 기호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왜 문자를 음성표시라는 구속복으로 속박하고 음성언어와 같은 순차적 구조를 강요한단 말인가? 그들에게 그런 생각은 애당초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미표시 문자가 페이지의 2차원성을 활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형태소를 한 번에 하나씩 늘어놓는 대신, 한 페이지 위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성언어는 필연적으로 시간 속에서 순차적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순차적인 의식이 아니라 동시적인 의식을 갖추고 있는, 그러니 실제로 말하기 전에 이미 자신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 헵타포드에게 음성언어는 "병목 현상을 일으킨다". 반면 문자의 경우에는 그러한 제약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미 완결된 문장의 형태를 한꺼번에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마치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사인을 하는 것처럼, 처음에 긋는 획이 이후의 다른 형태소에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글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 안다는 것은 곧 도덕적 차원이 불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세월의 책』에 관한 보르헤스 풍의 우화를 든다. 

 

과거와 미래에 걸친 모든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세월의 책』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다고 치자. … 이 여자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티슈처럼 얄따란 책장을 넘긴다. 자신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을 기록한 대목을 찾아낸 그녀는 다음 대목으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그날 그녀가 나중에 하게 될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녀가 책에서 읽은 정보를 바탕으로 경주마인 '될 대로 되라'에 100달러를 걸고 스무 배에 달하는 배당금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정말 그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청개구리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탓에 그녀는 경마에 돈을 걸지 않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세월의 책』은 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시나리오는 어떤 사람이 가능한 미래가 아닌 실제의 미래에 관하나 지식을 제공받는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비극이었다면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 사정에 의해 결국 그 운명에 따라 행동한다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갈 것이다. 어차피 그리스 신화의 예언은 모호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에 비해 『세월의 책』은 극히 명확하고, 책에 명시된 식으로 그녀가 경주마에 돈을 걸도록 강요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겨난다. 『세월의 책』은 절대 옳아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이 뭐라든지 그녀는 그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헵타포드가 처음과 끝을 모두 아는 존재라면, 그러한 존재에게 자유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나의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고, 그러면서 그 모든 세목들이 내게 속속들이 알려져 있다면, 내가 무엇을 향해 노력한다거나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경우 우리가 중요한 도덕적 개념으로 여기는 선택이나 책임과 같은 계기들 역시 의미를 잃을 것이다. 헵타포드는 자신의 미래가 거꾸로 강제하는 기계적 인과의 틀에 구속당한 셈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의 모든 행위는 완전한 무의미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아닐까? 당연히 루이즈도 이런 의문을 고려한다.

 

만일 아직 진상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가 이 광경을 묘사했다면, 이런 질문이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헵타포드들이 자신이 말하거나 들을 얘기를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다면, 그들이 언어를 사용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타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언어란 단지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행위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언어행위이론에 의하면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나는 이 배를 이렇게 명명하노라" 혹은 "약속하겠어" 따위의 서술문들은 모두 수행문이다. 발화자가 이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행위의 경우, 앞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결혼식 하객들은 누구나 "이제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실제로 목사가 그 말을 할 때까지 결혼의 의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수행문적 언어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 등가인 것이다.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루이즈는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헵타포드들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의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우리는 근대 과학의 세례 아래에서 성장하였으며, 헵타포드를 만나기 전 루이즈가 그러했듯 우리에게는 인과론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런 우리에게는 비단 우리가 이 논문에서 살피게 될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뿐 아니라, 신과 목적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의 세계관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업들이 그저 생소한 것을 넘어 '틀린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루이즈는 인과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이 처해 있는 상황이 "논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와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맨 처음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 양측은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 비해, 헵타포드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차적 의식이라는 맥락에서는 완벽한 현실이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지만, 강제 또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맥락이 서로 다를 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타당하다거나 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유명한 착시 현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고개를 뒤쪽으로 도린 우아한 젊은 여인으로도 보이고, 턱이 가슴에 묻힐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울퉁불퉁한 코를 한 노파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그림의 경우처럼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쪽 모두 동등하게 타당하다. 그러나 두 그림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글쓴이는 이러한 이야기로써 목적론적 세계관이나 목적론적 과학이 인과론적 세계관만큼 타당하다거나, 그리하여 목적론적 구상을 중심으로 하는 아퀴나스의 이론이 근대의 인과론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는 논의만큼 즉각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루이즈가 말하는 것처럼, 적어도 우리가 인과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라는 "두 그림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목적론적 관점을 기초로 하는 토마스를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헵타포드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가 살피게 될 중세인들의 이야기와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고대인이든 중세인이든 현대인이든 헵타포드처럼 미래를 모두 아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니 루이즈가 고백하듯, 우리와 헵타포드 사이에는 본질적인 간격이 있다.

 

아무리 내가 '헵타포드 B'에 숙달했다고 해도, 나는 내가 진짜 헵타포드처럼 현실을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마음은 인간의 순차적 언어들의 주형에 맞춰 만들어졌기에 외계인의 언어에 아무리 깊게 빠져든다고 해도 그 형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세계관은 인간과 헵타포드의 혼합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중세인들은 말하자면 근대 이후의 유산인 우리보다는 헵타포드에 조금 더 가까운 방식으로, 목적을 중심으로, '일어나야 할 결과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적인과론적 세계관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아퀴나스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이후 전통과 상식이라는 계기로 우리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이 논문은 그러한 연습의 흔적이자, 글쓴이보다 앞선 연구자들이 그러한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 펼쳤던 훈련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루이즈도 우리도 진짜 헵타포드처럼 세계를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세계관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딛은 루이즈는 중세 아퀴나스를 향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정답은 몰라도 적어도 방향성은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