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그레이엄 하만, 『네트워크의 군주: 브뤼노 라투르의 객체 지향 철학』 본문

그레이엄 하만, 『네트워크의 군주: 브뤼노 라투르의 객체 지향 철학』

primolevi 2020. 4. 3. 04:30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19.7.

pp.215-217

이제 화이트헤드가 남아 있는데, 확실히 그는 라투르의 가장 가까운 철학적 조상이다. 그들의 유사점들은 명백할 뿐 아니라 중추적이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는 도대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에 대한 이유는 항상 어떤 특정한 현실적 존재자의 구성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베르그송도 수긍할 수 없고 들뢰즈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을 원리다. 이 상황은 ‘과정철학’ 같은 어떤 단일한 표제어 아래 이 인물들을 모두 묶으려는 노력이 허술함을 예증하는 데 충분하다. 더욱이 라투르와 화이트헤드는 관계에 대한 큰 호감을 공유하는데, 화이트헤드는 관계를 ‘파악’이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제외하고 말하려는 시도는 화이트헤드가 ‘공허한 현실태’로 부르는 것만 제공할 뿐인데, 이 용어는 그가 유물론과 여타 실체론을 일축하는 데에도 사용하는 용어다. 이제는 라투르가 그런 이론들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같은 비판을 제시한다는 사실이 명료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라투르 철학에서는 상응하는 등가물이 없는 사변적인 우주론적 정신을 나타낸다는 것도 사실이다. 라투르를 오해의 소지가 있는 ‘과학철학자’로 부르곤 하지만 여태까지 아무도 그를 ‘자연철학자’로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은 계시적인데, 그 이유는 자연철학자가 화이트헤드에게는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한 가지 중추적인 이유, 즉 관계에 관한 라투르의 이론이 나타내는 더 강한 세속주의 때문에 화이트헤드 형이상학보다 라투르 형이상학을 선호한다. 현실적 존재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파악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모형에서는 ‘영원한 객체’, 즉 신 자체에 귀속되는 보편적 성질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 이 모형은 전통적 기회원인론의 한 변종에 불과하여서 그 학파의 결점들을 전부 공유한다. 라투르는 영원한 객체를 무시하고 상호작용을 국소적 층위에 붙잡아 두는 더 대범한 조처를 하는데, 이를테면 중성자와 정치를 연결하는 것은 졸리오지 신이 아니다. 사실상 라투르에게 모든 행위자는 졸리오 같은 것으로 널리 흩어져 있는 객체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 노력에 실패할 수도 있는 번역 매체다. 세속적 관계 모형을 선호하는 이유는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독선적인 무신론에 영합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관계 문제가 마법처럼 신에게 양도될 때 그 문제는 그저 명령으로만 풀리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를 신에게 맡기는 것은 모든 관계를 인간의 습관이나 범주에 귀속시키는 흄/칸트 접근방식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더 나쁠 것도 없지만 말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생명 없는 행위자는 자율성을 박탈당하여 유아기에 질식당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라투르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대로, 객체들의 관계가 당혹스러운 난제일  아니라 인간이든 신이든 간에 어떤 특권적인 전제적 존재자에 의해 독점되지도 않는 제1철학을 제시한다. 이 마지막 논점이 이 책의 잔여 부분에서 고찰한 주요한 주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