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서준식, 『서준식 옥중서한』, 본문

서준식, 『서준식 옥중서한』,

primolevi 2018. 8. 22. 13:28

 

서준식, 『서준식 옥중서한』, 노사과연, 2015(저자교열판).

 

 

머리말 : 다시 『옥중서한』을 내면서

4.

vii-xi면

 

청주 보안감호소 교화과장이었던 김치선 목사는 그런 나를 1984년 2월 어느 날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나보다 연배가 약간 위인 어떤 목사 부인을 소개했다. 나의 형 서승은 그의 저서 『옥중 19년』에서 김치선 목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김치선 과장은 널리 알려진 '악질'이었다. 평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전에 남쪽으로 탈출했으며, 감옥에서 간수로 있으면서 목사가 되었다. 기독교의 사명을 '멸공'이라고 생각하는 광신적 반공 복음주의자였다. ... 근엄한 목사의 가면을 쓰고 사상전향공작으로 많은 정치범을 학살, 고문, 탄압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일본 이와나미서점. 1994. 65-66쪽 / 번역: 서준식)

P여사는 당시 '독지방문위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전향 장기수들을 위문하기 위해 청주 보안감호소에 출입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김치선 목사는 당시 나의 괴로운 '지적모험'을 (그의 이해수준에서)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와 P여사를 만나게 한 목적도 나의 사상전향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P여사가 나와의 만남에 그렇게도 정성을 쏟게 된 이유는 '전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P여사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준식이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사람"이라는 막무가내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난생처음 만난 이 비전향장기수와의 인연을 '하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 믿고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P여사는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신'이나 '맹신'과는 거리가 먼,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전두환 철권통치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에도 상당한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처음 나를 만난 직후부터 맹렬한 속도로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나에게 보내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그의 교회 전도사였던 'L양'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면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L양은 소박하고 신앙심이 깊고 드물게 보는 강직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수인은 교도관이 나오라 하면 감방에서 나가야 하고, 따라오라 하면 그를 따라가야 한다. 그렇게 교화과 소속 교도관이 나를 데리러 오는 날 그를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그 두 여성이 교화과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얼떨결에 몇 번을 만난 후 나는 진지하게 그들을 '떨쳐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들의 열성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니까 그들의 신앙이 나에게 기대하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두려운 노릇이었고, 반대로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미안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런 식의 만남에서 나의 신념에 걸맞은, 즉 감옥에 갇힌 사회주의자로서의 위신과 품위를 온전히 지켜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광적인 반공사회이자 기독교 만능주의 사회에서 평균적인 상식을 가진 시민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 사회주의자가 '바보'가 되지 않기란 정말로 어려운 법이거늘, 하물며 수인에게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감옥에서의 그 어려움이야 너무도 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을 끝내버리려는 나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갔다. P여사는 때때로 내가 던지는 날카롭게 가시 돋친 언사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왜 그들을 '떨쳐내'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나에 대한 그들의 너무도 진지한 자세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만남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거듭하면서 지속되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예수와 기독교,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관해 서로 정반대의 해석을 가지고 입씨름을 했고, 헤어지면 편지를 주고받으며 싸웠다. 때로는 노골적인 야유와 조소를 던지면서,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해보려고 애쓰면서.... 그 싸움은 당연히 나의 예수 사색에 더없이 좋은 자극이 되었다. 예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대체로 그들을 만났던 2년 동안에 윤곽을 갖춘 것이다.

물론 우리의 만남에는 늘 김치선 목사가 입회했다. 그는 처음에는 별 복잡한 생각 없이 우리를 만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외부인사'와 비전향장기수와의 모든 만남이 보통 그러하듯이 오래지 않아 P여사 열의가 식을 것이며 적당한 시기에 우리 만남이 흐지부지 끝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남이 진지해지고 오래 지속되면서 나는 김치선 목사 얼굴에 종종 스치고 지나가는 당혹감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두 여성과 내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 김치선 목사에게 한편으로 나의 사상전향에 대한 진한 기대가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히 격리되어야 할 비전향장기수인 나를 그들과 계속 만나게 하는 부담 또한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를 만나게 하는 문제를 두고 보안과장과 김치선 목사가 '심하게 갈등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어느 교도관으로부터 듣고 있었다.

그 무렵 P여사와 L양에게 나를 면회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줄타기'였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김치선 목사뿐 아니라 보안과 간부교도관까지 면회에 입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가 종종 불허되거나 부분적으로 새까맣게 말소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만남은 확실히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결국 1986년 초봄 청주 보안감호소 당국은 이 '위험한 만남'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그들과 나 사이에 책 한 권은 됨직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편지를 섰고, 나는 그들에게 모두 22통의 편지를 썼다.

두 여성과의 만남이 단절된 후 나는 2년을 더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보냈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여운처럼 남아 있는 가운데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괴로운 '지적모험'은 계속되었다. 나는 『신약성서』 특히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에 골몰했으며, 예수가 살았던 2000년 전 시대에 나 자신을 놓고 예수의 삶을 '추체험(追體驗)'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월을 보내면서 나는 희미하게 나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모호했지만, 그리고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은 내가 이제는 더욱 강한 '사랑의 힘'을 지닌 혁명가로, 따라서 더 래디컬하고 더 강고한 혁명가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1987년 3월과 4월에 걸쳐 감행했던 51일 동안의 단식투쟁은 그런 변화의 결과였다. 오로지 '사회안전법 폐지'와 '나의 석방'만을 요구했던 이 고통스러운 단식투쟁을 통해 나는 비로소 '침잠'에서 벗어났고 오랜 '지적모험'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몸에 지닌 채 갱신된 모습으로 '일탈'로부터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단계에서 이를테면 나의 고통스럽고 감미로운 '일탈'의 한 부분이었던 P여사와 L양은, 그 고대의 아름다운 무정부주의자처럼 나의 몸에 뚜렷한 각인을 남겨놓은 채, 나의 삶과 '무관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88년 5월 25일, 내가 출옥하던 날에 P여사와 L양은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미 '무관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을 누르기 위해 애써 그들과 거리를 두었고, 그들 또한 몇 번의 만남 후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형성사에서 『서준식 옥중서간집』 발간을 기획할 때쯤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내가 옥중에서 그들에게 쓴 편지를 기념으로 갖고 싶다며 돌려줄 것을 청했었다. P여사는 『서준식 옥중서간집』에 수록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기꺼이 15통의 편지를 돌려주었지만 L양은 7통을 "모두 버렸다"며 돌려주지 않았다.

P여사가 자신이 받은 편지들을 책에 수록하지 말라고 한 까닭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지만, 내 나름으로 기독교인은 마땅히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며 살아왔다. 그들이 『서준식 옥중서간집』 발간에 그토록 혐오감을 나타낸 까닭 또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출판사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는 행위가 그들에게는 알량한 감옥경험을 팔아먹고 세상에 이름을 내려는 속물적 욕망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동안 나의 『옥중서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옥중서한』에 P여사와 L양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지 않은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내가 가까이 지내던 어떤 목사는 아예 자기가 P여사와 L양을 찾아가 승낙을 받아보겠다고까지 말했었다. 사람들은 또한 "궁극적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P여사의 권한이 아니라 당신의 권한"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의 『옥중서한』에 대한 관심과는 별도로 나는 나대로 P여사와의 '약속'을 어겨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의 입장에서 이제까지의 『옥중서한』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서 청주 보안감호소 시절 후기 편지를 읽은 독자라면 나의 이런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옥중서한』에는 P여사와 L양 부분에서 커다란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청주 보안감호소 시절 가장 중요한 정신활동 중 한 부분은 P여사와 L양과의 만남과 관련이 있거나 혹은 그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서 전개되었음에도 정작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쓴 편지들에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다기보다 나의 감옥살이 말기에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두 사람의 '존재'가 빠져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이제까지 늘 내 마음에 걸려 있던 문제였다. 나의 '젊은 날의 자화상',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이상 되도록 온전한 모습으로 내고 싶다는 것이 늘 나의 조촐한 희망이었다.

야간비행 판 『옥중서한』이 불과 3년 만에 ('품절'도 아닌) '절판'되어버린 데 대한 충격은 작지 않았다. 다행히 나의 40년 지기인 채만수, 그리고 그의 젊은 동지들이 선뜻 이 책을 복간하겠다고 나섰지만 이것 또한 몇 년을 갈지 모를 일이며, 아마도 십중팔구 이번 판을 마지막으로 『옥중서한』은 그 수명을 다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런 사정이 이번 판에서 P여사와의 '약속'을 어기기로 결심한 이유이다. 하기야 L양에게 쓴 7통의 편지가 빠져 있는 한 어차피 '나의 젊은 날의 자화상'은 결코 완전한 모습일 수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P여사로부터 편지를 돌려받은 지가 얼추 20년이 된다. 그리고 나는 조금 있으면 60세가 될 것이고 서서히 아름답게 죽을 준비를 해야 할 나이다. 나는 곱게 늙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 P여사가 나의 이 20년 만의 '배신'을 너그럽게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20년 동안 사과박스에 묻어두었던 P여사 편지를 찬찬히 읽어본다. 생각보다 편지 내용이 좋지 않다. 내가 한낱 시정잡배도 아니고 '철딱서니 없는' 운동권 학생도 아닌, 목숨 걸고 품위를 지켜야 할 '사상범'임을 온갖 말과 논리로써 설명하고 납득시키려는 나의 미련스러움이 참으로 답답하고 군데군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또한 L양에게 썼던 편지에 (내 기억으로는) 예수와 기독교는 물론 윌리엄 블레이크, 니콜라이 베르쟈예프, 조르쥬 루오, 우치무라 간조 등에 관한 나의 생각이 꽤 풍부하게 들어 있었는데 비해 P여사에게 쓴 편지는 많은 부분 사소한 문제에 대한 다분히 냉소적인 언쟁으로 채워져 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말꼬리 잡기' 식이라고 할 정도로 유치하다. 그 이유는 P여사와 내가 '기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 대한 식견도 웬만큼 있고 목사 부인으로서 교인들의 신망도 받는 P여사는 아무리 '사상범'이라지만 동생뻘밖에 안 되는 나에게 논리싸움으로 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사상범' 처지에 걸맞은 위신을 지키느라 P여사가 나이 어린 나에게 깊은 배려 없이 쏟아내는 말들에 사사건건 각을 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틀이 멀다 하고 날아드는 P여사의 그 많은 편지에 담긴 그 많은 이야기들을 그저 반박하는 것만 해도 벅찼고, 따로 차분히 나의 이야기를 전개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와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그토록 노력을 해준 사람인데 왜 좀 더 좋은 편지를, 좀 더 내용이 있고 예쁜 편지를 주지 못했을까?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하면 아픈 회한이 밀려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 정도 이상의 편지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적'에게 둘러싸인 고립된 포로의 몸으로 사회주의자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외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