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re incerta

책을 사는 이유 본문

책을 사는 이유

primolevi 2017. 4. 27. 01:09

이동진, 『밤은 책이다』 <프롤로그>에서.


이동진은 책부자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1만 권이 넘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으며, "어제만 해도 하루에 열아홉 권의 책을" 샀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 많은 책들을 다 읽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심지어 "어떤 책은 결국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산다. 그는 한꺼번에 10여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가며, 흥미를 잃으면 중간에 그만두기를 서슴지 않는다. 책을 구입할 때도 자신만의 감식안을 믿고, 책을 서재에 꽂아둘 때도 자신만의 방식을 따르지만, 그 많은 책더미 가운데 정작 자기가 꽂은 책을 찾지 못해 좌절하기도 한다. 얼핏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저는 변명합니다. 이게 제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했지요. 사랑하기 위한 조건을 줄줄이 내걸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생활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책을 정말 사랑한다면 문자의 형태로 책에 박혀 있는 지식이나 서사뿐만이 아니라, 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책에 담긴 이야기, 책에 서린 정신, 책에서 나는 냄새, 책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책을 파는 공간, 책을 읽는 시간 등이 모두 모이고 모여 책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낸다는 것이지요. 


(중략)


제게 좋은 책이란 너무나 흥미로워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독파해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보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이 아닌 셈입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 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 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