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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본문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primolevi 2017. 4. 27. 03:10

14-16

 

… 가령 내세나 천국의 거주민에 관한 이론에 대해서 내가 지속적인 저항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하다고 해서 반드시 여러 신앙들의 음악, 건물, 기도, 의식, 축제, 성묘, 순례, 공동 식사, 채색 필사본을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신앙인들의 여러 가지 관습과 테마를 상실함으로써, 세속 사회는 불공평하게도 너무 빈곤해지고 말았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관습이며 테마와의 공존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흔히 생각한다. 니체의 유용한 한마디를 인용하면, 그런 것들은 “종교의 악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道德’이라는 단어를 점차 두려워하게 되었고, 설교를 듣는다는 생각만 해도 격분한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양시킨다는, 또는 윤리적인 임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순례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전을 지을 수도 없다. 우리는 감사함을 표현하는 메커니즘을 가지지 못했다. 고상한 사람에게는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다는 생각조차도 터무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정신 훈련에 저항한다. 낯선 사람들끼리 함께 노래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우리는 가령 비물질적인 신에 관한 기묘한 개념에 몰두하느냐, 아니면 우리에게 위안이 되거나 미묘하거나 단순히 매력적인 의식들 — 우리는 세속 사회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들을 찾기 위해서 분투한다 — 을 그냥 포기하느냐 사이에서 불유쾌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처럼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본래 온 인류의 소유라고 해야 할 어떤 것, 그리고 우리가 세속적 영역에서 다시 이용한다고 해서 굳이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는 어떤 것을 종교가 자신의 독점적인 경험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도록 허락해 온 셈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만 해도 다른 종교의 좋은 아이디어를 다시 이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다. 즉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이교적 관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심지어 현대의 무신론자조차도 그런 관습이 애초부터 기독교적인 것이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새로운 신앙이었던 기독교는 한겨울의 축제를 받아들여서 크리스마스로 재포장했다. 또 철학적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관한 에피쿠로스주의의 이상을 흡수하여 오늘날 수도원주의로 알려진 것으로 바꿔놓았다. 폐허로 변한 옛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한때 이교의 영웅과 테마에 바쳐졌던 신전의 빈 껍질 속으로 기독교가 재빠르게 들어갔다.

 

18

이제부터 우리는 여러 신앙들을 독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혹시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세속적 삶 속에서도 수용 가능한, 특히 공동체의 도전과 관련된, 그리고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고통의 도전과 관련된 통찰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본적인 논제는 세속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지나치게 세속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뿐이다. 실현할 수 없는 관념들을 벗어던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신앙에서도 가장 유용하고 매력적인 몇 가지 부분조차도 그만 포기해버리는 불필요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18-21

이 책에서 펼쳐지는 전략의 윤곽을 살펴보면, 논의의 양쪽 진영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드는 사람은 누구나 못마땅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종교 지지자들이라면 자신들의 신조를 향한 이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선별적이고 체계적이지도 못한 고려를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종교란 뷔페가 아니라고, 즉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가장 좋아하는 것들만을 고를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항의할지 모른다. 그러나 상당수의 신앙이 몰락한 원인을 살펴보면, 그 신봉자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모조리 먹어야만 한다는 비합리적인 고집인 경우가 흔하다. 어째서 한편으로는 조토의 프레스코 화에 나타난 겸손의 묘사를 감상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수태고지(受胎告知)의 교리를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째서 한편으로는 자비에 관한 불교의 강조를 존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내세에 관한 불교의 이론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 여러 개의 신앙들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차용하는 것이야말로, 예를 들면 문학 애호가가 수많은 고전들 중에서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골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범죄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21개 종교 가운데 겨우 3개만을 언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편애나 성마름을 상징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이것은 다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이 여러 종교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 전반과 세속적 영역을 비교하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방법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호전적인 무신론자의 경우, 종교를 마치 우리의 갈망에 대한 지속적인 시금석으로 간주하는 이 책의 시도에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여러 종교의 극단적이고 제도적인 불관용을 지적하고, 또 한편으로는 예술과 과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위안과 통찰 역시 종교에 못지않게 풍부하다는 것을 — 뿐만 아니라 더욱 논리적이고 더욱 자유롭다는 것을 — 지적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덧붙여 물어볼지도 모른다. 종교의 수많은 측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즉 동정녀의 수태설에 동의할 수도 없고, 붓다는 토끼의 환생이라는 자타카[本生經]의 한 대목을 듣고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는 사람들이 종교와 같은 화해적인 주제와  왜 자신을 연결시키려고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런 답변이 가능하리라. 종교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를 분명히 가진 까닭은 그 순수한 개념적 야심 때문이라고, 또한 세속적 제도로서는 시도한 적이 없었던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종교는 윤리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이론에다가 교육, 패션, 정치, 여행, 숙박업, 입문 의례, 출판, 미술, 건축 분야 — 이런 관심 폭만 보아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세속적 운동이나 개인의 성취 범위조차도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 에서의 실제적 관여를 조합시켰다. 관념의 전파와 영향력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이제껏 지구상에서 목격된 교육적, 지적 운동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례를 보면서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몇 가지 특정 종교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에는 저마다의 옹호자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은 세속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적용되더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종교 생활의 여러 측면을 검토하려고 한다. 이 책은 종교에서 보다 독단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의 우리의 유한한 생애 동안에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마주쳐야 하는 재난과 슬픔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위안이 되는 몇 가지 측면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책은 이제 더 이상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현명한 것들을 구출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VIII 미술

 

259

 

불교의 고압적이지만 생산적인 큐레이터 식의 지시에서 영감을 받아서, 우리는 미술 작품을 향해서 이렇게 요구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이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상기시키려는 중요한 개념이 무엇인지를 보다 명시적으로 말해 달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자칫 그 작품들 때문에 주저하고 당혹해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인도한다는 생각에 대해서 강력한 엘리트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미술 작품은 설명서가 붙는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는다.

 

262

 

관건은 우리의 미술관을 위한 어젠다를 다시 작성해서, 미술이 일찍이 여러 세기 동안 신학의 필요를 따랐던 것처럼 이제는 심리학의 필요를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큐레이터는 자기가 속한 미술관의 공간을 재창조함으로써, 그 공간을 과거의 창조물을 모아놓은 죽어 있는 도서관 이상의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큐레이터는 예술이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술의 직접적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자각하고,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고, 불안한 인류가 겪는, 그리고 긴박한 위험에 빠진 지구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 계속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역시 예술의 직접적인 임무이다. 미술관은 단순히 아름다운 물건을 전시하는 장소 이상이 되어야 한다. 미술관은 우리를 선하고 똑똑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아름다운 물건을 전시하는 장소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미술관은 우리의 새로운 교회가 되려는 고귀한 — 그러나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 야심을 적절하게 성취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IX 건축

 

264-265

 

 16세기 전반기에 북유럽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에만 해도, 프로테스탄티즘은 시각예술에 대해서 극도로 적대감을 드러냈고, 복잡하고 풍부하게 장식된 건물을 빌미로 삼아 가톨릭 교도를 비판했다. “창조주 하느님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안내자이며 교사인 성서뿐이다.” 장 칼뱅(1509-1564)은 이 새로운 교파 가운데 다수의 반反심미적 정서를 대변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에게 중요한 것은 글로 기록된 말이었다. 공들여 만든 건축물이 없더라도, 성서만 있으면 우리가 하느님에게 이르는 데에는 충분했다. 성서에 의해서 촉진되는 헌신은 보석으로 장식된 성당의 회중석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텅 빈 방에서도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호화로운 건물은 오히려 그 감각적인 풍요함 때문에 자칫 우리의 정신을 흐트리거나, 거룩함 대신에 아름다움을 택하도록 우리를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이 심미적인 차원의 신성 모독 사건을 계속해서 일으켰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사건 때마다 사람들이 조각상을 박살내고, 그림을 불태우고, 설화석고 천사의 날개를 거칠게 떼어내버리는 등의 일이 자행되었다.